죄와 벌: 새출발을 위한 벌과 용서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되는가?’, ‘과연 사람의 죄는 신에게만 용서 받으면 되는가?’ 작가 도스또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독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라스꼴리니코프를 통해 작가는 두 질문에 대답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가난 탓에 학업을 중단한 채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 알료나에게 돈을 빌려 생활하는 대학생이다. 노파에게 진 빚이 쌓일수록 그의 인생은 불행해지고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결국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라스꼴리니코는 술집에서 한 대학생의 주장을 듣고 살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대학생은 노파가 늙었고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 인물이기 때문에 살해하고 그녀의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같은 자리에 있던 장교는 자연법칙을 근거로 노파를 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살인 계획을 철저히 세운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에게 돈을 빌리러 온 척하며 집에 침입한 후 노파를 살해한다. 그 순간 노파의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 라스꼴리니코프는 그녀도 살해해 버린다. 라스꼴리니코프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장 중요시하는 윤리적 사상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의 죽음이 그녀에게 돈을 빌린 다수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변명한다. 그에게 노파는 다수의 행복을 위한 쓸모없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키는 라스꼴리니코프가 느끼는 죄책감을 통해 공리주의적 윤리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작가가 신의 벌이라 여기는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죄책감 때문에 라스꼴리니코프는 심한 열병을 앓고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공리주의 관점에서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결국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다수의 행복과 상관없이 죄는 죄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죄책감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작가의 주장했듯이 죄책감을 신의 벌로 여길 수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신의 벌로 여기고 엄중하게 생각한다. 둘째, 죄책감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신앙심이 강한 소냐에게 자신의 살인을 고백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주정뱅이 관리인 아버지 대신 가정을 책임지는 소냐에게 도움을 주며 둘은 서로 신뢰하게 된다. 그 후 라스꼴리니코프는 소냐가 죄를 짓고도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기도하여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살인을 자백하게 된다. 라스꼴리니코프에게 죄를 자백 받은 소냐는 그에게 성서에 나온대로 땅에 입을 맞추며 신에게 사죄하고 세상에 죄를 자백하라고 조언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소냐의 조언대로 땅에 입을 맞추고 경찰서에 자수한다. 감옥에 수감된 라스꼴리니코프는 점차 정신이 돌아왔고 열병 등의 질환은 치료되었다. 그는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인간에게 지은 죄를 신에게 용서받으면 되는 것일까? 만약, 죄인이 자신은 신에게 용서 받았다고 무죄를 주장한다면 이를 무죄로 인정해야 하는가? 인간에게 지은 죄를 신에게만 용서 받아서는 안 된다. 첫째, 인간에게 지은 죄는 인간에게 용서 받아야 한다. 가해자는 인간에게 용서 받는 대가로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신에게만 죄를 용서 받는다면 피해자는 아무런 배상을 받을 수 없다. 또한 피해자들은 멀쩡히 돌아다니는 가해자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혐오할 것이다. 둘째, 만약 사람들이 신에게만 죄를 용서 받는다면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이 없어지면서 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사회의 범죄자 수는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신에게 용서 받는 대신 법적 처벌 받아야 한다.
또한 신에게 죄를 용서받는 것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신에게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모두 같은 종교를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다면 갈등이 깊어질 것이다. 또한 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신에게 용서를 받았는지 여부를 증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에게 용서 받았다는 사실은 증명할 명확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죄는 사람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 벌은 죄의 고통에서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죄와 벌>에서는 사람이 죄를 짓고 신이 죄에 대한 벌을 내린다. 그리고 벌을 받은 죄인은 신에게 자신의 죄를 사죄하고 신에게 구원받는다. 죄는 인간의 충동, 욕구 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인간은 살면서 적어도 한번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본능에 따라 죄를 저지를 유혹에 빠진다. 물론 욕구를 충족하려는 본능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충동과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자연, 인간 등에게 해를 입히는 순간 그 행위는 죄가 된다. 그렇게 죄를 지은 인간은 자신이 세상에 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또한 사회는 법에 따른 형벌 등을 통해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내린다.
나는 <죄와 벌>을 읽고 형벌과 용서의 새로운 의미를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엔 벌을 용서를 위한 처벌로 여겨왔다. 그러나 <죄와 벌>을 읽은 후, 벌은 새출발을 위한 사색의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은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비하하며 정서적으로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등 정서적으로 타락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고 이 사회와 자기 자신에게 용서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