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의 갈등과 운명

문학 작품에는 다양한 갈등이 드러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는 개인과 자신, 그리고 개인과 신의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데미안’은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소년을 만나고 나서 자기 내부의 세계를 깨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신을 의심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종교적인 삶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데미안과 종교에 대해 몇번 토론하고 논의한 이후로 아버지의 권위와 신의 절대적 위치, 그리고 완전한 선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품는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두 세계에 걸쳐져 있다고 믿는다. 하나는 신과 부모님이 계신 순수하고 성스러운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크로머와 이단들이 있는 세속의 세계이다. 싱클레어의 성스러운 세상은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깨진다. 그는 어쩌다가 비행청소년 ‘크로머’에게 찍혀 협박을 받아 자신의 저금통과 하녀의 잔돈 등을 훔치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세계를 벗어났다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과 묘한 쾌감을 느끼며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뇌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런 그의 혼란과 깊은 생각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싱클레어는 순간적이나마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통찰해낸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세계나 사상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의 신발에 묻은 진흙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이 순간의 생각 이후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더이상 용서를 구해야 할 절대적인 대상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는 이 순간부터 자신은 더이상 성스러운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느낀다. 이것이 ‘데미안’에 드러나는 개인과 자신의 갈등의 시작이 된다.
싱클레어의 혼란과 고뇌는 데미안이라는 소년을 만나며 더 가중된다. 데미안은 크로머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해 버리지만 싱클레어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견해를 남긴다. 싱클레어는 난생 처음으로 절대적인 신의 권위를 깨부수는 견해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그는 동시에 설득력있는 데미안의 신성모독적 견해에 매료된다. 결국 그는 절대적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자신과의 갈등과 더불어 종교와의 갈등도 생겨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싱클레어이나, 작품의 제목은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주제는 자아의 성장이기도 하지만 성장의 과정에서 타인이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그를 성장으로 이끈 주역이다. 또한 싱클레어는 늘 데미안을 선망하고 멘토 또는 롤모델로 바라보는데, 이 작품은 싱클레어의 시점에서 쓰인 회고록에 가깝다. 그렇기에 싱클레어의 성장과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데미안이 작품의 제목이 된 것이다.
싱클레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로 진학하며 자신의 성스러운 세계 및 데미안과 멀어진다. 그곳에서 싱클레어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고독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신념, 자기파괴적 욕구와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함에 갇혀 운명을 찾으려 방황한다. 싱클레어는 인생을 무의미하게 사는 학생들을 비난하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고독감을 느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가져야 할 종교적 믿음이나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자신과의 갈등을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오르간 소리를 따라 들어간 교회에서 삶의 인도자를 만나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 교회에서 만난 오르간 연주자와 친분을 쌓고, 미래와 과거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자신을 인간의 본질과 운명을 향해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르간 연주자가 사실은 그저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오르간 연주자가 공유하던 역사, 문화, 예술과 같은 분야의 견해들은 모두 과거에 기반한 기록일 뿐이라는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과거는 자신을 미래로 이끌어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냉소적인 비판을 가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에 이어 두번째로 자신을 인도해주던 사람의 진실을 알고 도망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클레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고향으로 진학한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와 함께 이런 싱클레어의 방황은 멈춘다. 데미안과의 만남과 함께 그의 또다른 인도자를 찾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에게는 기숙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신의 욕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을때 보았던 ‘베아트리제’ 라는 형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베아트리제’의 모습을 데미안의 어머니에게서 발견한다. 그녀는 데미안과 매우 닮은 모습으로 싱클레어의 성장을 이끈다. 그녀는 개인의 내면이 외부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그런 내면을 조종해서 운명을 찾는 법에 대해 조언한다. 싱클레어는 그녀로부터 자신의 진실된 의지와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법을 배우며 운명에 몸을 맡겨 살아가고자 한다.
싱클레어는 이런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는다. 부모님과 신의 보호 속에 화초처럼 자랐던 소년은 자신의 운명을 찾아 항해하는 굳건한 남성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절대적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싱클레어는 더 자유로워졌다.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평화롭고 모범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첫번째 세계에 가려진 어두운 세계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친구들만 봐도 두 세계를 볼 수 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그닥 모범적이지 않은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늘 노는 친구들끼리 서로 단체 채팅방을 파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고, 서로 소문을 퍼트리고, 싸우고, 정말 다양한 사고에 휘말린다. 그런데 이런 세계와 나의 평화로운 세계는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다.
데미안의 견해에 따르면 오히려 자신의 원초적인 본능을 쫓으며 자유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한국 학생들은 그렇게 살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학생들에게 모범적인 삶과 학업적 의무를 강요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데미안처럼 운명을 쫓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한 싱클레어는 유복한 성직자 집안의 자녀로, 집안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살아왔다. 소설 중 어디에도 싱클레어가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비를 벌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생각들은 주로 자신의 추상적인 운명이나 현재의 욕망에 집중되어 있으며, 학업에 대한 걱정은 없다. 싱클레어는 본능을 따르는, 나쁘게 말하면 대책없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 군에서 장교가 되어 아사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반면 비슷한 집안형편을 가진 한국의 학생들은 학업과 미래에 대한 압박에 시달려서 추상적인 ‘운명’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없다. 한국의 학생이 학교 수업은 제대로 듣지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고등학교 생활의 절반을 술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고 방에서 명상하는데 사용했다면 취업은 커녕 번듯한 대학 문턱도 밟기 힘들 것이다.
나도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었다. 나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미국에 살았기에, 학교를 가고 필요한 공부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은 온전히 내 뜻대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학업에 밀려 내 자유를 빼앗겼다. 한동안은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는 지금까지 이런 ‘한국 학생의 운명’ 을 회피하고 있던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미안을 읽고 난 후 이런 삶의 방식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은 독자들에게 세계를 깨고 나오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도 어쩌면 우리가 깨부숴야 할 ‘알’ 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을 읽고 나면 생기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과연 ‘데미안’을 찾아야 하는가? 그 정답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물론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계를 파괴하고 새롭게 성장해 나가는것을 선택하고 싶다. 누군가는 자연스레 여러 인도자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저 삶의 흐름에 따라 운명을 쫓게 될 수도 있다. 또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방식이든 자신을 미래로 이끌어줄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행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