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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의 ‘새’와 우리의 새장

김기택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치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매달아 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 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 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김기택의 ‘새’는 학습된 억압이 어떻게 대상을 제한하는지에 대한 시이다. 시에서 새는 창살 틈으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으나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새는 이런 현실에 순응하여 날개를 포기하고 다리로 걷는다. 순응과 포기에 익숙해진 새는 새장이 열려도 날아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새는 가끔 바깥에서 오는 공기를 느끼며 새장 외부를 동경하지만 이미 자유를 포기해 버린 새는 스스로 새장 안에 자신을 가둔다.
‘새’는 현실의 사람들을 빗대어 나타내는 대상이며, ‘새장’은 현실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제약들을 의미한다. 또한 새장 밖의 세상은 자유를 상징한다. 김기택의 ‘새’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억압당한 나머지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개인을 보여준다.
시에 나오는 새를 현실의 중학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새장’은 대한민국의 입시 경쟁 체계가 될 것이고, 새장 밖의 세상은 경쟁에서 참여하지 않는 중학생의 삶 또는 입시가 끝난 성인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새’, 또는 중학생들은 입시가 끝나고 나서도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타인과 나의 성취를 비교하고, 평균이 아닌 이상적인 표준을 잣대로 나의 위치를 평가하는데 익숙해진 중학생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단순히 평가 항목이 모의고사 성적에서 월급과 같은 것으로 바뀌었을 뿐, 삶의 전반에 거친 경쟁 체계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제약에 익숙해져 벗어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새장을 벗어나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어렵다. 현실에서는 대다수의 새들이 새장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들이 새장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멍청해서가 아니다. 새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보장된 안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입시 경쟁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 안에서는 실패하더라도 실패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 날다가 떨어져도 어느 정도의 바닥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입시 경쟁 외, 즉 새장 밖의 세상에서는 실패의 형태도 강도도 예측하기 어렵다. 떨어졌을 때 바닥이 얼마나 깊을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입시 경쟁 내에서 ‘실패’한다고 치더라도 다른 실패자들의 데이터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학교를 가서 어떤 삶을 살겠구나, 하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입시와 학교생활에 참여하며 얻은 지식과 같은 것들이 향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입시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의 ‘실패’는 각기 너무 다른 모습이라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수의 학생과 다른 것을 배우고 다른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삶의 궤적이 아예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중학생들은 완전하지만 책임이 따르는 자유 대신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안전이 보장되는 새장을 선택한다.
나는 청소년기에는 새장 안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새장 밖을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안정적인 기반을 가진 채 성인이 되었을 때 최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물질적,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청소년의 상태로 과도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제약을 감수하더라도 안정적인 범위 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또한 체제로부터 오는 제약이 오로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새장’속에서 청소년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체제와 규칙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 표준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청소년기를 ‘새장’ 안에서 보내며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을 잊어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시에 나오는 것처럼, 새들은 방법을 잊어버린 것 뿐이지 자유를 갈망하는 의지를 잃은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단순한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을 초월하여 자신의 의지로 삶을 결정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의지 또는 그런 환경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의지를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청소년기에 얻은 안정적인 자아와 가치관을 토대로 소극적 자유가 아닌 적극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청소년기에는 새장 안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새장 밖을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