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당신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잘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헛된 것들을 좇는 중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은 나와 잘 맞고 배울 점도 많은 친구나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실현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그는 돈과 명예에 집착한 당시 상류층들의 삶을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느라 인생에서 진짜로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산다.
이반 일리치는 새로운 도시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후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라는 여인을 만나고 곧 결혼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결혼 후에도 아내와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그녀의 기분이나 감정은 무시한 채 ‘가볍고 유쾌하게’ 문제를 받아들인다. 결국 그들은 월급이 빠듯하면 멀어지고 풍족하면 잠깐 다시 가까워지는, 서로에게서 ‘편리함'만을 찾는 소원한 관계가 된다. 아내와의 바람직한 관계에서 꼭 느껴야 하는 사랑과 믿음의 감정조차도 이반 일리치의 결혼 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뿐만 아니라 아예 가족과도 거리를 둔다. 일과 부, 사교계의 최상류층과 어울릴 때 느끼는 허영심에 빠진 그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이란 원래 함께 시간을 최대한 많이 보내며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존재다. 힘들 땐 서로에게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함께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바로 가족이지만, 이반 일리치는 자신과 가족 사이에 두꺼운 벽을 쌓아 관계를 단절해버린다.
이반 일리치는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진다. 그는 동료와의 관계에서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진다. 업무와 관련되지 않았다면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업무 때문에 만난 사람이라도 공적인 관계가 끝나면, 그 순간 다른 모든 관계도 끝난다. 하지만 진정한 동료들은 업무의 종료와 상관없이 서로를 통해 험난한 삶을 헤쳐나갈 힘을 얻고 성장을 거듭한다. 이처럼 이반 일리치가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부인조차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기 삶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깨닫는다. 그는 병에 걸려 상태가 계속 악화되자 육체적 고통보다도 자신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옆구리 통증이 점점 심해질수록 이반 일리치는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어째서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고 싶어…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는 걸까.’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올바르고 품위 있다는 굳센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반 일리치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거짓말,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고 치료를 받으면 분명히 회복할 것이라는 거짓말에도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본문에 나와있듯이 “다른 무엇보다…이런 거짓말이 그의 마지막 남은 삶을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 때 그에게 유일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 사람은 바로 하인 게라심이었다. 게라심은 다른 사람들처럼 거짓말하는 대신 이반 일리치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마음아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언제나 최선을 다해 돕는다. 게라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자신도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 게라심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가 이반 일리치를 보살피던 중 한 말에서 드러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이런 수고 좀 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반 일리치도 어느 순간 게라심처럼 죽음에 순응한다. 눈을 감기 한 시간 전, 그는 자신의 삶이 언젠가부터 잘못되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제라도 ‘올바른 것'을 통해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멀어진 가족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이반 일리치가 이렇게 정신 차리고 옳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죽음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가 ‘난 죽지 않아'라고 자신을 속이는 일을 그만두고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자 자연스레 남은 삶이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죽음은 ‘의미 있는' 인생이 가능하도록, 즉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보람된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다.
살다 보면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건지 회의감이 들 때가 찾아온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진정으로 의미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이럴 때는 먼저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지금 죽는다면 과연 아무 후회도 없을까?’하고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이반 일리치가 했던 것처럼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거야. 하지만 상관없어. 올바른 것을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올바른 것'이 대체 뭐지?”하고 곱씹어보는 거다. 삶과 죽음은 매우 동떨어진 두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죽을지 알면 어떻게 살지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