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빈
결국 같은 결말에 이른다
버려지거나, 삼켜지거나 쓰레기통에 처박히거나
이번은 다를 거라며 다시금 단물을 머금는다
그러나
씹힌다, 빨린다, 빠진다
단물이 죽죽 빠진 겉껍데기로 버려진다.
해설 - 심원
이 시는 껌이라는 일상의 사소한 사물을 통해 인간 관계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 시는 껌이라는 소재의 ‘사소함’을 이용해 인간의 ‘소모성’을 드러낸다. 껌은 반드시 버려지거나 삼켜지거나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 역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번은 다를 거라’고 희망하지만, 결국 그 희망은 배반당한다.
둘째, 이 시는 ‘맛의 은유’를 통해 욕망과 소진의 구조를 보여준다. 껌은 단물이 빠지면 버려지는 존재다. 인간 역시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혹은 자본의 체계 속에서 ‘단물’을 빨리기 위해 소비되고, 결국 껍데기만 남은 채 버려진다. “씹힌다, 빨린다, 빠진다”라는 동사의 연쇄는 그 과정의 폭력성과 기계성을 드러낸다. 껌은 혀 위에서 저항할 수 없는 타자의 욕망에 휘말려 마모되는 존재이며, 인간 역시 그러하다.
셋째, 이 시가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반복’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결국 같은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번은 다를 거라며 다시금 단물을 머금는다.” 이 부분이 결정적이다. 인간은 껌처럼 버려질 운명을 알면서도 매번 다시 삶을 붙든다. 이것은 단순한 허망함이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것, 소모를 알면서도 다시 살아내는 것, 그 반복이야말로 인간을 껌과 다르게 만드는 마지막 차이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비극성은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자기 성찰로 귀결된다. 껌의 운명이 곧 우리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국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단맛을 믿고 입안에 넣는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은 허망하게도, 그러나 아름답게도 자기 삶을 정당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