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하얼빈>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하얼빈 의거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러시아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다. 이 의거로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하고, 안중근은 얼마 뒤 감옥에서 사형된다.
안중근은 애국심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내적 갈등은 욕망과 규범, 혹은 규범과 규범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충돌할 때 발생한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의병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각오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정이 있었고, 평화로운 삶을 원했다.
안중근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율법은 살인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직후 안중근도 살인자로 인식되어 교회에서 파문 당했다. 안중근은 일본이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학살을 자행한 것이 더 큰 죄라고 말하며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했고, 빌렘 신부는 이 말로 설득당해 사형 전 마지막 예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운동에 좋은 영향을 주었지만,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악에 악으로 맞서면 끊임없는 복수가 벌어지고, 처음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이 결국 부당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로 변질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 테러조직들은 원래 종교의 율법으로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종교 집단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열강 국가들의 핍박을 받았다. 결국 그런 상황을 멈추기 위해 그들은 무력을 동원해 다른 나라의 군대나 주요 시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
나는 예전에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을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악에 악으로 대응하는 것이 어떠한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이용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수단의 기준은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마지막 방법인지 알 수 없다. 또한, 폭력을 쓰지 않고 승리를 쟁취한 인물도 있다. 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삶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를 점령하여 인도인을 핍박하는 영국 군대에 안중근과 달리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처했다. 결국 그의 비폭력 운동은 성공했고, 나는 악이 악에 맞서는 마지막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악에 악으로 맞선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일까? 나는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한 방법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안중근이 영웅으로 추앙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방법이 잘못되었더라도, 안중근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우선시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안중근을 함부로 깎아내릴 수도 없다. 안중근과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비폭력보다 민족, 또는 공익을 더 우선시했을 것이다.
나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이후, 형무소에 끌려갔을 때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토를 비판하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왜냐하면 그는 더 큰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안중근처럼 조국과 공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친일파처럼 개인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친일파의 후손들은 부유한 삶을 사는 반면에, 정작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가난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해방이후 그들이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들은 광복 직후 법원에 의해 가중처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 쌓아온 부와 일본 군대에서 근무한 경력을 이용해 미군에 들어갔고,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처벌을 쉽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프랑스도 과거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치 부역자를 다르게 대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의 나치에게 점령당하여 국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에서 우리나라와 다르게 나치의 잔당들을 모두 참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후에 큰 피해 없이 자주적인 국가로 발전했다.
우리는 역사에서 안중근같은 독립운동가나 군사독재에 저항한 시민들 등 나라와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서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좋음보다 옳음을 택한 사람들이다. 내가 안중근이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런 일을 할 자신이 없다.
이 작품은 나에게 삶에서 옳음과 좋음 중 어느 것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옳음은 윤리,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말한다. 반면에 좋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옳음을 추구하는 삶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옳음을 추구하는 삶은 나의 도덕성의 성장과 자아 성찰을 돕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공동체에 이익에 기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옳음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은 불행하고, 힘들 수 있다.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좋음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완벽하게 옳음을 추구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회에 기여하려고 노력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삶을 살고 싶다.